▲ 최영찬
소설가
도서출판 활빈당 대표

제32화 사간원, 사헌부

조선은 임금의 나라라기보다는 사대부와 함께하는 나라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신하의 권력이 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있으니 오죽하면 중국의 황제가 사신에게 ‘너희 나라는 임금보다 신하가 더 쎄다며?’하고 비아냥거렸겠습니까. 이렇게 최고권력자인 임금도 조선에서는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역대 임금 중에서 자기 멋대로 권력을 휘두른 왕은 연산군뿐이었습니다만 결국 신하들에 의해 쫓겨났지요. 정치는 왕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권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사대부의 전황도 감시하는 기관이 있었으니 이것을 대간(臺諫)이라고 했습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적발하는 사헌부의 대관과 왕의 전황을 막는 사간원의 간관을 말합니다. 대관은 지금의 검사와 같은 역할의 감찰을 통해 관료의 부패를 척결했고 간관은 목숨을 내걸고 왕의 잘못을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간원과 사헌부는 성격이 매우 틀린 일을 했지만, 서로 견제감시를 하다가도 양자가 서로 힘을 합쳐 조정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대로 자칫하면 부패 독단하기 쉬운 왕권, 신권을 최전선에서 막는 관리가 대관이었습니다. 이런 막중한 일을 하는 대간은 과거에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강직,청렴한 인물이 선발되었습니다. 판서나 정승이 되려면 반드시 대간의 직책을 경험해야 했으니 조선 최고 엘리트 코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청관(淸官)이라고 불렸습니다. 관리들은 대간에서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받아야 했고 동의가 없으면 관직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고위관직에 대해서도 인사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먼저 사간원에서는 지금도 언론이 정치가 잘못되는 것을 꾸짖듯이 끊임없이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신의 허물을 상소를 통해 고발했습니다. 사헌부도 관리들의 비행을 낱낱이 적발해서 상소했습니다. 이 사실은 관리들은 물론이고 재야의 선비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기에 허투루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국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관료들을 탄핵하는 기록으로 도배하다시피 합니다. 이걸 보면 조선의 정치는 매일 싸운 것으로 알겠지만, 이런 대간의 강직한 처신이 국가가 건강하게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왕은 이들의 충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권력의 속성상 갖가지 방법으로 이들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간관들이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유림의 반발로 크게 박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간관은 대낮에도 술을 먹어도 눈감아 줄 정도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임금과 세도가를 가리지 않고 그릇된 것을 비판했습니다. 증거가 없어도 풍문만으로도 탄핵할 수 있으며 이름이 거론된 고위 관료는 일단 사직을 하고 나서 진위여부의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지금의 검찰청에 해당하는 사헌부는 어떨까요? 느슨한 사간원과 달리 법을 집행하는 조직이었기에 상하관계가 엄격했습니다. 출근 때부터 서열에 따른 의식이 엄중했고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고 법을 집행하는 과정도 무척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항명도 자주 있어 상사에 의해 법이 부당하게 집행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사헌부의 감찰은 부패 척결뿐 아니라 관리들의 봉록을 지급할 때 부정이 없도록 입회하기도 하고 시장에 자주 나가 터무니없이 탐욕한 상인들에 의해 물가가 올라 민중이 고통받지 않는 일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직도 간혹 문제를 일으켰으니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옹호하거나 대립을 통해 불협화음이 나자 이들이 전횡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학식이 높은 선비들이 모인 홍문관에서 감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쟁이 심해지고 권력이 남용되면서 자신을 감시 탄핵하는 대관을 자기편을 끌어들였습니다. 애초와 달리 대간이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의 중심에 서게 되자 개혁론과 폐지론이 나타났습니다. 국정을 올바르게 다스리려고 설치한 사간원과 사헌부가 오히려 불화의 근본이 되고 부정부패에 물들게 되면서 나라가 점차 쇠약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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