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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연중기획>한강하구 접경지역 마을이야기(6)- 포내1리·포내2리

기사승인 2020.02.13  11: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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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만
前 김포문화원장

포내1리

① 땅이름 과 선거인(先居人)

포내리(浦內里)라는 지명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789년(정조 13;己酉)에 펼쳐낸 <호구총수> 통진부 부내면의 방리의 기록이다.

원래는 개안에 있는 마을인 ‘개안마을’이 한문으로 표기되면서 포내리(浦內里)가 되었다. 이 마을의 선거인으로는 양성(陽城)이씨(李氏), 단양(丹陽)전씨(田氏), 부안(扶安)임씨(林氏) 등이 살았으며 지금도 세거하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중기까지는 포구로서 선업(船業)이 흥하여 연평도 조기잡이 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후 개펄을 막아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지었으며 땅이 비옥하여 나라에서 경작하는 궁답(宮畓)이 많았었으며 ‘궁들’이란 땅이름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광복 후 쌀이 돈이던 시절, 이 마을 부농들은 자녀들을 모두 도회지인 서울과 인천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향학열이 높았다.

이 마을 안동산은 마을의 주산으로 이 산에는 누운 거대한 적송(赤松)이 있었다. 이 소나무가 당목(堂木)인데 마을주민들은 이 당목에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굿을 하기도 했다. 이 나무가 영험하여 나라에 변고가 생기게 되면 이 소나무가 울었다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마을 어린이들은 무더운 여름이면 이 누운 당목에 무동을 타고 더위를 이겨 냈다고 한다.

근래에 이 당목이 벌목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민간신앙과 민속의 그루터기가 없어 진 것 같아 아쉽다.


포내2리(수현)

① 땅이름 :

1760년(영조 36;庚辰)에 펼쳐 낸 <여지도서>에 수유현(水踰峴)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강화도를 지키는 목구멍(咽喉)같은 곳으로 성벽을 쌓았던 기록이 있으나 흔적을 알 수가 없다. 국도를 확장하면서 멸실된 것 같다.

이 곳 고개는 육로로 강화도를 가려면 꼭 거쳐 가는 길목으로 마치 높은 지형을 넘어서 물이 흐르는 것 같이 보이므로 ‘물이 넘어가는 고개’로 수유현이라고 불렀다.

1968년 포내리를 2개의 행정리로 나누는 과정에 ‘수현(水峴)’으로 줄이어 부르게 되어 ‘물을 넘는 고개’, ‘물고개’로 뜻이 달라졌다. ‘무내미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② 난민정착촌 :

포내2리는 문수산의 정기를 받은 마을로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개성, 연백, 풍덕 등지에서 피난 온 난민들이 모여 덕박골에 난민정착촌을 만들고 정부에서 주는 구호용 밀가루를 배급받고 문수산의 나무로 숯을 만들어 서울·인천 등지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 때 문수산이 벌거숭이 민둥산이 됐다. 난민들 대부분은 서울로 진출하여 모두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③ 덕박골 :

포내2리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이 ‘덕박골’이다. 순수한 우리말 땅이름으로 ‘덕’은 우리말로 ‘가파른 언덕’의 뜻이고 ‘박’은 우리말 ‘바위’의 준말이다. 따라서 ‘가파른 언덕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문수산 산줄기 남쪽에 안긴 마을로 산의 경사도가 가파르기 때문에 생겨난 땅이름이다. 특이한 땅이름이 남아 있다는데 정감이 간다.


④ 은골 :

포내2리 새마을주택이 들어선 곳이 옛 은골이다. 금과 은을 캐던 곳이라고 하는데 흔적이 없다.

김포신문 gimpo1234@naver.com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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