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관아 용금루에 있었던 영조와 정조 대왕의 글을 적은 현판을 찾습니다

김포에는 용금루가 있었습니다. 용금루는 음식점 상호가 아닙니다. 김포를 대표하는 누정(樓亭)입니다. 용금루에 오르면 김포 전경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요지에 위치했습니다. 때문에 영조대왕과 정조를 비롯하여 많은 선인(先人)들이 올랐던 곳입니다.

에코센터 옆에 있는 감바위나루에도 귀복정(龜伏亭)이 있었고 그곳에서도 시를 남긴 문인들이 있었습니다. 경관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영조와 정조가 김포를 방문하여 어제(御製 임금이 지은 글)를 남긴 것은 장릉 때문입니다.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1623~1649)의 생부인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으로 1632년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원종, 능호를 장릉이라 했습니다, 김포의 진산 북성산이 장릉산으로 바뀐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조대왕은 1745년 8월 19일 김포를 방문하고 정조는 1797년 8월 15일에 김포관아를 방문하여 남긴 어제를 현판으로 걸어 두었습니다.

“<중략> 장릉의 옥 같은 분묘는 군의 남쪽에 봉안되어 있어 영조, 정조 두 황제 폐하께서 선후로 어림하였고 보륜(寶輪)과 탄묵(誕墨 임금의 큰 글씨)을 군(김포관아)의 누(樓 용금루)에 걸어 안치해 놓았으니 천년에 한 번 나온 솜씨가 환하게 빛나 아직도 새 것 같다.” <중략> -1910년 5월 기록, 출처: 금릉군지 완역본 20쪽 -

금릉군지 기록에 의하면 1908년경 일본 헌병이 김포관아를 침탈하면서 영조와 정조의 말씀을 적은 현판이 1910년 이후에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김포문화원에서는 이와 같은 김포의 문화자원을 시민과 함께 찾고자 합니다.

영조와 정조대왕의 어제가 적힌 현판이나 사진을 제보하는 분들에게는 문화원에서 소정의 사례(김포페이)를 합니다. 시민들의 관심과 제보를 바랍니다.

 

題湧金樓 (제용금루)

正祖 御製 (정조 어제)

 

靑烟萬竈宿貔貅(청연만조숙비휴)

蟹戶鹽村一望悠(해호염촌일망유)

匝地農謳渾四野(잡지농구혼사야)

中天月色最三秋(중천월색최삼추)

港連揚子仍漕舶(항련양자잉조박)

波湧金輪更水樓(파용금륜경수루)

長夜抵年遲不發(장야저년지불발)

却聽歸鴈過江州(각청귀안과강주)

 

副摠管 巨曺允亨 奉敎書(부총관 거조윤형 봉교서)

 

푸른 연기 일만 아궁이에 용감한 군사들 묵는 곳

게 잡고 소금 굽는 마을들 아득히 끝이 없네.

들녘 농부들의 노랫소리는 사방에 울려 퍼지고

중천의 달빛은 늦가을에 가장 밝구나.

양화진 이어진 항구에 조선(漕船)이 줄을 잇고

금빛 달, 물 위에 솟더니 수루를 오르네.

일 년 같이 기나긴 밤, 떠날길 더디기만 한데

강 고을 지나 돌아가는 기러기 소리 들린다.

 

부총관 조윤형이 교지를 받들어 쓰다.

 

※출처 : 『홍재전서(弘齋全書)』 권7 <제금릉관(題金陵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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