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광 김포우리병원
기획관리 실장

우리집에는 닭띠생이 네 명이다. 큰 형님과 형수님이 을유생이고, 큰 조카는 기유생, 내가 정유생 닭띠다.

십이간지 중 닭이 갖는 의미는 월로는 8월을, 방위로는 서쪽을, 때로는 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를 가리키며 옛 고향의 논밭을 장닭으로부터, 봄 나절 둥우리에서 새끼를 몰아 개나리 울타리를 구구대는 씨암탉에 이르기까지 어린 날의 정취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뿌옇게 밝아오는 여명을 재촉하며 목울대 길게 빼고 흰소리 내지르는 자명종 역할까지 도맡는 억척스러움으로, 닭띠로 태어난 나를 나름대로 우쭐하게 하기도 한다.

굳이 ‘띠’를 따지지 않더라도 한 집안식구의 생김생김이나 성격 등 요모조모를 뜯어보면 오십보백보격으로 비슷하지만, 유독 닭이 갖는 부지런함에 있어서만은 큰 형님 내외분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질 않는다.

천성이 순하고, 평생을 농사꾼으로서 참 무던히도 힘든 세월을 살아오신 탓에 몸에 배인 부지런함은 두 분의 자산이다. 큰 형님 내외분의 우리 형제들에 대한 부지런한 장닭과도 같은 보살핌의 몸짓은 선친을 일찍 여읜 여러 동생들에게 울컥 눈물 쏟는 감동으로 다가와 형님 내외분에 대한 눈높이는 배움의 정도나 인품 등에 관계없이 늘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오랜 병고 끝에 아버지께서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로 명을 달리하시면서 남긴 것은 얼마인지도 모를 채무와 19살 큰형님을 필두로 세 살 터울의 일명 독수리 5형제였다. 일찍 잃어버린 둘째 누님을 가슴에 묻으신 어머니에게는 오랜 병간호 끝에 야속하게 보낸 남편을 위해 흘려줄 눈물마저 남아있지 않았고 올망졸망한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큰 형님은 자신의 인생이 아닌 가족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송아지 때부터 키워 코뚜레 뚫고 우마차로 짐을 나르는 길들여지지 않은 중송아지에 비유될 만큼 어린 나이에 삶의 무게를 몽땅 짊어졌다.

억척스럽게 산비탈을 개간해 일궈낸 밭과 바수거리 지게로 다랑치논 열세배미를 두배미로 합배미치며 힘들어하는 가운데서도 “너희들은 배워야 한다”고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시며 고래고래 호통치던 형님(그때의 호통이 아우들에 대한 호통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채찍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의 굵은 눈물 속에서 우리 다섯 형제는 서로 의지하며 부대끼듯 커왔다.

칠순을 바로 앞에 두셨던 어머님께서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으로 진작에 떠나신 선친을 찾아가시고 식구끼리 둘러앉아 지난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제 좀 먹고 살 만하니까 어머니마저 저세상으로 가버리셨다”며 까맣게 탄 굵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치시며 오열하시던 큰 형님의 눈물이 얼마나 많은 인내와 세월의 의미를 갖고 있는지 철이 든 동생들은 그제서야 알 수가 있었다.

지난해 이른 장미꽃이 피던 날 어버이날에 맞춰 일찍부터 아들 내외와 부모님의 유택을 찾았다. 안개꽃과 어우러진 카네이션 꽃 속에 웃고 계시는 어머님 얼굴을 오버랩하며 선산에 도착했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큰 형님의 굽은 등이었다.

“이놈의 잡풀은 뽑아도 뽑아도 또 난단 말야….” “형님!! 그러지 마시고 제초제라도 뿌리시죠, 요샌 잔디만 살고 다 죽이는 약도 있다던데….” “편하기야 하겠지…. 그래도 이놈들이라도 자꾸 나야 한 번이라도 더 와보지 않겠니….” 잔을 올리고 찬찬히 제수를 챙기는 큰 형님께 아들이 물었다.

“큰아버지 이게 무슨 풀이에요?” “그건 삽주 싹이다. 나물해 먹으면 좋지. 할머니께서 유독 삽주싹 산나물을 좋아하셨단다.”

“그럼 이건요!” “이건요…” 도무지 끝날 기미가 없어 중간에 껴들었다. “큰아버지 귀찮게 하지 말아, 아빠가 가르쳐 줄게.” “그럼, 아빤 이게 무슨 풀인 줄 알아?” “글쎄, 큰 형님 이게 무슨 풀이었죠,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아!! 벌써 어린 날과 아픈 세월을 망각한 나에게 과연 큰 형님은 어떤 존재인가.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가에서 여린 쑥을 뜯어 쑥국을 하고 잎여린 질경이로 나물을 무쳐 오랜만에 맛깔스런 점심을 먹고 얼마 전에 방앗간에서 쪄왔다며 양식하라고 실어주는 쌀을 싣고 오면서 지난 가을,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쌀가마와 배추, 무, 고춧가루 등 김장거리를 휭하게 부려놓고는 서울 작은형네로 총총히 떠나시던 큰 형님의 뒷모습에서 오래전에 떠나신 선친의 모습을 뵌 것이 결코 한순간의 착시가 아니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들아!! 꽃보다 더 예쁜 게 뭔지 아니? 너희들이 할머니 산소에서 본 들풀과 길가에 깔려있는 큰 아빠의 인생과도 같은 잡초란다. 결코 뽐내지 않으면서 짓밟히고 뽑히고 꺾여도 해마다 다시 살아나는 잡초야 말로 너희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고 아껴야 할 것들인 게야.”

이런 큰 형님께서 금년 1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셨다. 매일 오가던 동네 신작로에서 방심하셨던지 달려오는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가 난 것이다. ‘호사다마, 새옹지마ʼ 란 말이 떠오른다. 머리를 다쳐 김포우리병원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옮겨가며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하늘에서 지켜주시고 계신 부모님 덕분인지 기적적으로 회생하시어 지금은 재활치료에 전념하고 계신다.

아카시아꽃 향기가 만발한 초하의 싱그러운 미풍이 오래되지 않은 합장된 부모님 산소 주위를 뱅뱅 돈다. 한참이나 먼 산을 응시하시던 큰 형님의 뒷모습이 항상 기억 속에 있다. 그래서 병실에 누워계신 큰 형님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애잔하다. 잡초 중에서 유독 강하고 질긴 잡초가 있는데 그것은 길 위 또는 길가에서 자라는 질경이다.

모든 생명들이 살고 싶어 하는 좋은 환경에서는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경쟁을 피해서 밟히는 길에 밀려나와 사는 질경이처럼 큰 형님의 인생도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며 억척스레 살아오신 질경이 같은 인생이다.

큰 형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어 선산도 함께 가고 그동안 피땀흘려 가꿔 논 자랑스런 터전 위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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