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 20

박영준

김포중앙교회 원로목사

1950년 6월 26일 월요일 아침, 7살짜리 초등학교 1학년 생으로 시대 상황을 모르던 때, 아침 일찍 모내기를 하러 논에 나가셨던 어른들께서 급히 들어오셨고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황급하게 짐을 싸고 계셨는데, 영문을 모르던 나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입학할 때 할아버지께서 사 주신 책가방을 메고 집 대문을 나섰다. 학교 정문을 향해 가는데 정문에서 나오던 6학년 누나들이 두 손을 저으며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와 그 길로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다.

멀리서 포 소리와 총소리가 들려오지만 처음 듣는 소리였고 전쟁이 무엇인지 영문도 모르고 어른들이 가자는 대로 따라 나섰던 것이다. 큰댁 식구들과 함께 짐을 마차에 싣고 남자 어른들은 지게에 짐을 잔득 메었고 여자 어른들은 머리에 일 수 있을 만큼의 짐을 이고 많은 사람들이 길이 메어지게 나선 것이다. 나도 책가방과 가벼운 짐을 메고 어른들의 재촉을 받으며 떠났는데 사실은 어디까지 가야 될지도 모르고 무작정 피난길을 나선 것이다.

그렇게 출발하여 처음 도착한 곳이 대곶면 송마리 산자메에 사시는 아버지 이모님 댁이었다. 그곳에서 점심을 해 먹고 있는데 포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러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우리 철없는 어린이들은 새로운 마을에서 즐겁게 놀았다. 그 동네는 특별히 감나무가 많았는데 우리는 감나무 밑에 떨어진 구슬만한 감을 양쪽 주머니에 가득 주워 넣고 마당 한쪽 나무 그늘에서 OP선을 불에 녹여 뽑은 철사 줄에 감을 꿰었는데 누가 더 많이 꿰매나 내기라도 하듯이 길게 꿰어서 목에 칭칭 감고 놀았다. 그러는 중에 어른들께서 서둘러 속히 떠나야 한다며 짐을 챙기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감줄을 목에 걸고 책가방을 등에 메고 다시 어른들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감줄을 목에 걸고 바쁘게 걸을 때 감줄이 아래로 쳐지면서 발에 걸려 넘어지니까 어른들께서는 빨리 벗어버리라고 하시는데도 그걸 벗어버리지 못하고 챙기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난다. 만약 실에 꿰었더라면 발에 걸릴 때 쉽게 끊어지기라도 할 텐데 철사 줄에 꿰었으니 앞으로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한 곳이 부평. 어떻게 아는 집이라며 그 집에 들어가 그 밤을 지나게 되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전깃불을 처음 보았으니 너무나 신기했고 황홀하기도 해서 어린 애들은 천정에서 내려온 줄에 매달린 전등불을 보면서 좋아서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북쪽에서 따발총 소리와 대포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뒷동산에 올라가 멀리 북쪽 방향을 바라보고 온 젊은 사람들은 불꽃놀이 하듯이 쾅 소리가나면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에 아마도 조강거리 시내와 우리 동네가 모두 불타는 것 같다고 아우성들을 친다.

그 밤을 그렇게 지내고 아침이 되면서 우리는 포 소리를 들으며 다시 서둘러 출발하여 평택까지 갔는데 다리가 끊어져서 건널 수가 없었고 이미 인민군이 우리보다 앞서 갔기 때문에 더 이상 피난 가는 의미가 없다고 해서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폭탄을 맞아 무너지고 불에 탄 집들을 바라보며 전쟁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으나 우리 뒤에 돌아온 사람들은 길옆에 즐비하게 쓸어져 있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들을 보았다고 하며, 옆집 아저씨는 혼자 떨어져 지내다가 돌아오며 ‘혹시 내 가족의 죽은 시체는 없나’하며 작대기로 길가에 쓸어져 있는 시체를 뒤척이며 왔다고도 한다.

집에 돌아온 후 우리는 마음을 조이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군에 나가든지 아니면 인민군에 잡혀 가든지 해야 했고 가끔 인민군들이 와서 돼지나 소 닭을 잡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 당시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었으니 양식도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9월에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지만 1951년 1월 중공군이 다시 밀고 내려오면서 우리는 다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것이 1.4후퇴였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맺음으로 인해서 전쟁은 일단 그쳤지만 폐허가 된 이 땅에는 피폐한 삶이 이어지게 되었다.

6.25의 비극, 1950년 6월 25일 주일 미명(未明). 소련제 탱크 3백대를 앞세우고 동포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면서 이리 때처럼 밀려 내려왔는데 김포에서는 그 다음 날에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붉은 군대의 남침으로 백만 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십만여 명의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생기고 수천수만의 애국인사가 납치를 당하고 도시는 폐허가 되고 공장은 잿더미로 화하고 조국의 강산은 피바다로 변하고 3천만의 동포는 공포와 기아의 사선을 헤매었다.

독사에게 물려본 사람이 독사의 무서움을 알고, 추위에 떨어본 사람이 추위의 고통을 알고, 굶어본 사람만이 배고픔의 괴로움을 알게 되듯이 전쟁의 비극을 겪어본 사람만이 그 참상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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