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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눈물

기사승인 2021.10.12  21: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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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화해할 시간입니다 제3회

최영찬 소설가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겨우 11년 함께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뚜렷이 남아 있는데 광복 후 봉성리로 미군이 짚차를 타고 와 사냥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차 안의 것을 훔쳐간 모양입니다. 다툼이 벌어지자 아버지가 나서서 미군과 영어로 대화하며 수습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드물게 서울에 있는 배재학교에 다닌 지식인으로 영어를 잘하셨거든요.

그런 아버지가 6. 25 때 치안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느냐고요? 아니지요. 오히려 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포상을 받을 분이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자 우리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인민군 치하에서 서기를 보게 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인민군에 쫓기는 국군들을 숨겨주었고 우익 청년단장 조카도 집에 숨겨 주었습니다. 만약 인민군들에게 숨겨준 사실이 발각되면 아버지는 그들 손에 처형당하셨을 겁니다.

민경완 여흥민씨 유수공파 회장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공산주의 선전을 하고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철없는 우리는 그들이 가르쳐주는 ‘김일성 찬가’를 열심히 따라 했습니다. 이렇게 봉성리가 빨갛게 물들고 있을 때 인천 상륙작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동안 마을에서 감시의 눈을 번뜩이며 적화를 기도하던 내무성 관리들은 황급히 마을을 떠나 북으로 갔습니다. 좌익 활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도 이들을 따라갔습니다. 앞장서서 그들을 도와 동네 사람을 괴롭힌 사람도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을에 남았습니다. 당신은 일상적인 동네 일을 맡은 서기였고 국군을 숨겨주었으니 아무 일이 없을 것으로 믿었던 모양입니다. 우익 치안대가 아버지를 부역자로 붙잡아갈 때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동네에서 서기일 보라고 해서 사무를 본 것뿐이다.’ 소리 높여 항의하던 말씀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하성면 면사무소에 갇힌 아버지가 드실 음식을 챙겨주시면 왜 그리 가기가 싫었는지요. 아버지가 나쁜 일을 저질러서 갇힌 것으로 학교친구들이 알게 될까 그랬던 거예요. 하루는 밥을 가지고 가니 창고에 안 계시어 아버지를 찾으니 면사무소에서 나오시며 할머니와 가족들의 안부와 논보리 심었느냐 물으시어 모른다 하니 일꾼에게 빨리 심으라 하시고 창고로 돌아가시면서 잘 가라 하신 말씀이 부자간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 몰랐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납니다. 그 후 숨겨준 군인 박해문 씨가 찾아왔는데 아버지는 이미 학살되신 후지요 그분은 양촌면 수참리에서 의사를 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일 보면서도 우익 청년단장의 조카도 숨겨주었지만. 청년단장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한패로 몰려 죽을 수 있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석방 도장 찍는 것을 미루었던 청년단장도 뒤늦게 어머니와 우리에게 용서를 빌어서 화해했습니다. 그 뒤로 청년단장과 그 조카가 도움을 많이 주셨고 나도 유감없이 대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의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통한의 슬픔을 뒤로하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집이 불타 친척 집에 의지해 살았지만, 학교는 계속 다녔습니다. 폭격으로 천장이 날아간 교실에서 공부하는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했고 동생들의 학업을 위해 나는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었는데 손재주가 있어 자질구레한 일도 하며 생계를 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교복을 입고 상급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서글픔에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봉성산 너머 전류리의 한학자에게 한문을 배웠습니다. 신식 교육은 더는 받을 기회가 없으니 한자라도 잘 익힐 생각이었지요. 당시는 신문도 모두 한자여서 내 식으로 공부했습니다. 활자로 인쇄된 종이만 보면 무엇이든 다 읽었습니다. 배움의 길이 차단되니 더욱 갈망한 거지요. 이때 익힌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항상 책 읽고 공부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미술재료를 취급하는 친척 화방의 종업원으로 첫 출발을 할 때 제품의 이름이 영어도 아닌 불어라 외우기 어려웠지만, 한문을 배울 때 쓴 암기력으로 몽땅 외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화방에서 일하면서 영어, 수학 등 학교공부와 미술재료기법을 주경야독(晝耕夜讀)했습니다. 몇 년 후 독립해서 마포 정확히 말하면 이화여대 길 건너에서 ‘신촌화방’을 열고 화가, 미술대학 교수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화가나 학생들에게 외상도 많이 주었으며 외상값을 독촉하지 말라고 종업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신용과 정직을 토대로 했기에 사업은 번창하여 이화여대 구내에 2호점을 하게 되었습니다. 활발하게 사업하는 한편 불우한 청소년, 소년소녀가장을 돕는 일과 지역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렇게 50년 세월을 보내면서 운영하던 두 곳의 화방을 두 아들에게 맡기고 은퇴했습니다. 지금은 고향인 김포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한 짧은 추억을 더듬으며 여생을 보내는 중입니다. 저는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었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모두 불행한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지요. 앞으로 우리 후손이 전쟁하지 않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편히 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최영찬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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