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녕포구(康寧浦口) 마을이 있던 터전을 걷다 보면 조강에서부터 문수산 정상을 따라 안개가 사선으로 오르는 풍경을 만난다. 한 폭의 수채화를 보면서 끝자락에 다다르면 강녕포구 옛 선착장 건너로 북한 개풍군이 보인다. 문수산도 안개도 포구마을 터도 개풍군의 산야도 조용하다. 사람은 간데없고 새들만 오락가락하는 적막강산(寂寞江山)이 따로 없다. 5대째 마을을 지키는 이영범(용강리 지도자)씨와 마을을 걸으며 강녕포구 이름의 의미와 포구 문화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과거 번성했던 포구를 생각하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서해에서 밀려오
돈이 호수의 물처럼 많이 쌓이는 동네김포를 동서로 나누면 서쪽은 염하, 동쪽은 폭이 넓은 한강이 흐르고 있다. 남북으로 나누면 북쪽은 벌판에 야산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남쪽은 대부분 수로가 있는 드넓은 벌판이다. 김포 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잡은 고촌읍 전호리는 기름진 논밭이 있는 벌판이며 아라뱃길과 한강이 마주 닿는 곳이니 김포의 특색을 모두 갖춘 곳이다. 예부터 서해에서 밀물을 타고 조강을 거쳐 마포나루를 가는 가운데 전호리 포구가 있었고 부평의 젖줄인 굴포천을 따라 인천과 연결되고 있으니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전호리는 예전에는
지부상소(持斧上疏)의 유래 옳지 않은 일이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임금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상소(上疏)는 ‘계', ’장계' ,‘봉사' ,'봉장' ,'만인소', '지부상소’가 있다. 계(啓)와 장계(狀啓)는 관리들이 올리는 보고서며, 봉사(封事)와 봉장(封章)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밀봉하여 올린다. 만인소(萬人疏)는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올리는 상소다. 가장 강력한 상소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하는 지부상소(持斧上疏)다. 도끼를 들고 대궐 문밖에 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를 말한다. 역사에 등장하는 지부상소는 고려시대
김포는 도농 복합도시로 현재 인구 70만 명을 앞두고 있다. 김포 태생으로 외지로 나갔다가 늘그막에 다시 귀향하는 이를 포함해 토박이는 7, 8만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전 농협 이사인 이만의씨는 효령대군 16대손으로 풍무동에서 태어나 김포에서만 살면서 벼 다수확으로 대통령상을 받아 김포 농민의 전설을 써내려 간 분이다. 그는 여섯 살 때 마흔두 살 나이의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6.25 동족상잔이 끝난 해 설날 며칠 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열한 마지기의 논과 삼백 평의 밭이 유일한 생명줄이라 어머니와 누님들은 논밭으로 나가 일
애기봉평화생태공원 인근에 자리한 경창군 및 정빈홍씨 묘역은 지난 2021년 12월 김포시 향토유적으로 등재됐지만 무관심과 관리 소홀로 세간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다.현재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의 묘소는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75번지에, 정빈홍씨 묘소는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59-11에 모셔져 있다. 경창군 묘역은 1644년 5월 16일, 정빈홍씨 묘소는 1638년 각각 조성됐다.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 상석, 향로석 등이 묘역을 구성하고 있으며 묘비는 1987년 세워졌다.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 1596~1644)는 조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기억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현재의 의식 속으로 불러내어 현재 관점에서 다시금 간직하고 보존하는 행위” 즉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했다. 김포신문은 올해 4월부터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 사업으로 이달 말까지 50회에 걸쳐 ‘김포의 역사를 찾아서’ 연재를 진행했다. ‘김포’라고 하는 지역적 공간을 범위로 지역의 변화를 이끈 사건, 기록, 장소, 문화재, 생활문화에 걸쳐 반추하고 새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급격한 도시화와 성장 속에서
김포한강시네폴리스 일반산업단지 공사 현장에서 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유물 15점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포시에 따르면 한강시네폴리스 지표조사 중 고촌읍 향산리 산 32일대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돼 (재)한백문화재연구원에 의뢰, 시굴조사에 이어 정밀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정밀발굴조사 지점은 한강로에서 김포한강시네폴리스 진·출입로 부근으로, 한강과 직선거리로 8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한강 본류를 배후로 구릉이 산재한 저지대 농경지를 매립해 만든 농로 옆 완만한 경사지다.김포시 관계자는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최종 문
고산사 고려시대 백운 경한스님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를 방문한 지공(指空) 스님의 흔적을 찾아서 여주 신륵사. 양주 회암사. 광주 무등산, 합천 해인사로 전국을 돌아다니다 지공의 제자 백운스님(1287∼1374)이 김포 고산사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공은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서 1326년(충숙왕 13년)에 고려에 왔던 스님이다. 지공의 부도와 사리는 북쪽에 묘향산 안심사와 장단군 화장사에 있고 남쪽에는 양주 회암사에 있다. 지공은 인도사람으로 고려에 2년 7개월을 머물렀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지공, 나옹, 무학의 영정
경기도 지사가 행정 편의를 위해 경기도를 남북으로 나누겠다고 하면서 불거진 김포의 서울편입 문제가 전국 이슈가 되었다. 한강물은 두 지역으로 나뉘었지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실제로는 길이고 다리요 라이벌이었다. 영어 Rival(라이벌)은 강을 뜻하는 river에서 나온 단어다. 라이벌은 적이 아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경쟁을 통해 상대를 인정하고 발전하는 관계를 말한다. 민초들과 함께 한 기인김포를 통한 원활한 운송공급으로 서울은 골고루 물자가 분배되었다. 쌀은 물론이고 생활필수품이 조
김포를 상징하는 금빛 물결의 평야가을이면 드넓은 평야를 수놓는 황금빛은 그 자체로 김포를 상징한다. 홍도평을 지척에 둔 사우동에는 금파초등학교와 금파중학교가 있다. 학교 앞에 펼쳐진 금빛 물결을 따라 교명을 ‘금파(金波)’로 했다. 김포의 문화예술인들은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서 ‘금파문화제’를 펼쳤는데 90년대 말까지 이어진 행사였다. 비옥한 평야를 가진 김포에서 쌀은 숙명이었다. 1986년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와 서암리 일대에서 김포반도 벼농사의 개시를 밝혀 줄 획기적인 자료가 발견됐다. 지표 아래 약 1~4m 토탄층에서 고대의
1799년 2월 11일 충청도 공주사람(公州 幼學) 임박유(林博儒)가 농사법에 관하여 제출한 책자(冊子)를 정조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있다. 책자는 보고서라고 보면 된다. 임박유는 농사법과 백성이 지켜야 할 내용을 열네 가지 주제로 작성했다. 그중에서 열두째와 열넷째는 주제만 옮기고 ‘밀다리 쌀’이 나오는 열셋째 부분은 일부 내용만 옮긴다.열두째, 담배의 재배를 엄히 금지하여 농사짓는 밭을 넓히는 것입니다. 열셋째, 토질을 살피고 곡식의 성질을 변별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리도록 독려하는 것입니다. 땅의 차등은 산간인지 평야인지, 높은
인간의 본성은 폭력이다. 인류 역사는 이 잔인한 본성 위에 만들어졌다. 초기 인류들은 작은 부딪힘에도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동굴에 남은 원시인의 유해를 보면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다. 이들의 난폭함은 중국 고대사 기록에도 곳곳에 남겨져 있다. 인간이 개별 인간에서 사회적 인간으로 바뀌면서 지력이 높아지고 폭력이 배제된 평화를 갈구했다. 이러한 바탕에서 종교가 탄생했다. 거의 같은 시대에 석가모니와 공자, 뒤이어 예수가 등장해 경쟁적인 폭력 대신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전파했다. 이렇게 해서 폭력은
김포가 지금은 도농복합도시로 수도권 도시 중에 발전이 더딘 듯 보이지만 6. 25 이전에는 매우 부유한 동네였다. 김포평야 하면 주식인 쌀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수확량이 많았다. 게다가 조강포서 하역한 물품을 상인들이 서울로 운반했기에 북적이는 길을 ‘조강거리’라 이름 지었다. 그러면 왜 서해로 들어온 배가 곧장 마포나 용산으로 가지 못했을까? 한강물 타고 곧장 가면 물류비용이 엄청나게 절감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그것은 시암리 앞의 암초 때문이었다. 좁은 강폭이라 큰 배는 지나가다 좌초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조강포에서 하역해야 했
고촌 신곡사거리에서 한강방향 끝머리에 ‘영사정(永思亭) 터’라는 빗돌이 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는 비문까지 새길 정도면 아마 의미 있는 유래가 서리지 않았을까. 근처에 여러 기의 묘가 보인다. 16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남원윤씨 묘역이다. 1529년 윤은(尹訔)의 묘를 시작으로 직계 후손 19기의 묘가 있다. 윤은의 6대손 윤계(尹棨)가 오늘 만나볼 김포의 역사인물이다.김포의 달맞이는 ‘영사정’에서 윤계가 잠든 영사정 묘역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김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절경 중 하나로 꼽힌다
전쟁은 문화를 빠르게 전파하는 기능도 하지만 문화를 송두리째 없어지게 하는 기능도 한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에 황해도 연백 문화는 인천과 김포, 통진지역으로 피난 나온 주민들에 의해 전파(傳播)되었으나 조강(祖江)포구, 강녕(康寧)포구, 마근(麻近)포구에 있던 치군패, 용왕제, 당집, 당산나무, 선박 등은 마을과 함께 통째로 사라졌다. 그곳에 살았던 포구 사람들도 생업을 찾아 전국으로 이주하고 치군패를 비롯한 포구 문화는 70년 동안 잊혀졌다.치군패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통진 두레놀이 가락 검증과 계보를
김포는 염하강, 조강, 한강의 물길로 싸여 있는 반도로 서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수운교통의 길목이다. 경기도 최대 곡창지대로 서울, 인천, 강화, 부천, 고양, 파주 등 크고 작은 도시와 인접하고 있다. 예부터 김포반도는 강화도와 함께 국방요충지로 외적이 침입했을 때 즉각 저항하는 DNA가 있는 곳이다. 구한말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운양호 사건(1876년)을 겪고 1907년 정미(丁未)해에 봉기한 정미의병의 중심지였다. 역사적으로 김포를 중심으로 수도권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허암 정희량(1469-?)은 출생기록만 있고 사망한 기록이 없다. 김포를 떠난 기록도 제각각이다. 사실관계는 정확하지 않지만, 김포태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인천에서는 허암이 머물렀던 곳을 유허지(遺墟址)로 보존하고 있다. 1910년 김포군에서 발간한 『금릉군지』에는 5월 5일 단오에 허암이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사람들이 찾는 기록이 나온다. 집을 나간 허암이 시간이 지나도 귀가하지 않으니 집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의 종적을 찾아다니다 감암포 물가에 상관과 짚신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같은 『금릉군지』‘누정’ 편에는 감암
김포초 앞 아트프라자문구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 얽힌 추억이 없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등굣길, 하굣길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특별한 볼 일이 없어도 뻔질나게 드나들던 문구점. 문구점은 1970~1990년대 초등학생들에게 그야말로 핫한 공간이었다.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준비물부터 학용품에 군것질거리에 소소한 장난감, 다양한 팬시용품에 액세서리까지 없는 게 없던 문구점. 친구의 생일잔치에 갈 때 꼭 들려야 하는 곳도 바로 학교 앞 문구점이었다. 과연 2023년의 학교 앞 문구점은 어떨까?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을 나누어주도
역사는 이긴 싸움은 크게, 그렇지 못한 싸움은 작게 다룬다. 조선 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인물로 이순신과 권율 장군이 첫손에 꼽힌다. 왜란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역도 출몰까지…. 조선은 암흑기를 걸었다. 이 시기엔 누가 있었을까? 풍전등화같은 조선의 운명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켜낸 인물, 역사에서 소외됐지만 강렬했던 한 장군의 이야기를 꺼내본다.몸과 마음을 다스렸던 고향, 하성장만.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다. 시호는 충정(忠定
김포 북부 통진에는 통진향교가 있는데 유학을 가르치던 조선시대 학교이다. 오늘로 치면 서당은 초등학교고 향교는 중학교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향교는 지금의 중학교와 무엇이 다를까,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기 전에 그들이 배우는 유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유교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인 공자가 정립한 사상이다. 유학은 유교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유교는 제례에서 종교적인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높은 수준의 윤리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로 고려 때까지 이어왔으나 불교에 눌려있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