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운 발행인

로마신화에 나오는 문지기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로 표현된다. 선한 얼굴과 악한 얼굴이다.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사고라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자신을 가해하는 자살이나 타인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한다. 평상시의 온순하고 선한 모습과는 지극히 대비되는 이중적 야누스의 두 얼굴이다.
스리랑카의 폭탄 테러로 300여 명이 넘는 인명이 불시에 죽음을 맞이한 것은 종교적 야누스의 얼굴이다. 인종과 종교, 민족과 국가 간의 타인과 타자에 대한 혐오와 비틀린 신념들이 작용하는 불행들이 또 다른 반목과 갈등을 생산해내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원인들을 제거해가면서 우리끼리 온순한 사회를 만드는 노력들을 기울여야 한다. 

얼마 전 경남 진주시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묻지 마 살해범의 행각이 이채롭다. 다수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에 불을 지르고 불을 피해 도망 나오는 이웃주민들을 무차별하게 사상시켰다. 어른과 아이 구분 없이 전쟁터처럼, 처단하듯 흉기를 휘둘렀다. 그럴 수 있는 인성을 키운 42년의 세월을 보낸 그의 족적이 불현듯 알고 싶어진다. 인간의 잔인성을 극성으로 키워낸 그 자의 살아온 과정과 환경이 자못 궁금한 것은, 혹시나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내 이웃에 있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죄질이 극성인자의 신상을 공개할 때도 기자들을 향해 “나도 피해자”를 소리칠 때 그 자의 험악한 눈자위는 일반의 화난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살인자만의 공포스러운 시선으로 TV를 통해서 보면서도 한 줄 전율감을 느끼게 했다. 무자비한 살인자의 선입견이 있기도 했겠지만 저런 눈길을 가진 자가 과연 살인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함께 스쳐갔다.
우리나라 인구의 70% 이상이 공동주택에 살다 보니 엘리베이터가 이웃과의 만남의 공간이다. 목례를 하거나 짧은 인사말, 평범한 미소 정도가 보통이다. 그런 작은 격식도 안 차릴 때는 눈의 시선도 한 층마다 바뀌는 숫자나 엉뚱한 벽만 향하게 된다. 
진주의 불상사를 접하는 요즘은 더 이웃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이런저런 관계로 엮이기 싫다는 안타까운 자구적 행위이니 비난하기도 어렵다. 공동주택에 산다는 것은 대체로 생활의 편리함 때문이다. 아파트 벽에 의지하여 높은 공간적 위치에 있다 보니 단독주택처럼 누군가 타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고 그만큼 안정성과 개인 프라이버시를 지켜내기 용이한 시설이 된다. 층층이 모여사는 공간을 벗어나면 사람들은 서로와 소통하며 관계하고 어울리는데 정작 거주의 공간을 이웃으로 하는 공동주택에서는 커다란 담벼락을 쌓고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살아간다.
아래윗집의 만남은 층간소음으로 어느 때 돌변할지 모를 폭탄이웃일 수 있고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담배냄새와 위층에서 털어내는 담요자락 먼지, 심심하면 던지고 깨지는 소음에 험악한 고함소리 등등, 재수 없게 내가 이웃과의 불편한 정면 당사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기피현상이 공동주택의 이웃은, 이웃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부딪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소통하고 교류하지 않는 이웃으로 변모해 왔다.

타인에 대한 존중
좋은 이웃보다는 차라리 무관심의 이웃으로 자신을 보호받고 싶다는 심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워런 버거는 “아름다운 질문들”이라는 책을 최근 출간하였다. 현재의 관계와 상황에서 어떻게 더 좋은 관계와 상황으로 바꿔갈 수 있을까? 의 미션을 제시하고 그 해답으로 좋은 질문, 아름다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생각하라고 말한다.
짧은 만남인 승강기 안에서 이웃의 불안을 덜어주고 작은 신뢰나마 쌓으려면 가볍고 부담 없는 인사성 대화를 주고받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엄마와 어린아이를 만났다면 가벼운 목례와 “아이가 참 똑똑하게 생겼군요?”라는 멘트도 적절할 것이다. 아이를 칭찬하면 아이뿐 아니라 엄마까지 즐거워진다.
하버드대 엘리슨 우드 브룩스 교수 등의 공동논문 “질문한다고 다치지 않는다”에서 아름다운 질문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호감도가 상승한다고 밝혔다. 적합한 질문과 적합한 방법으로 관계증진이 도모된다는 사실의 증명을 한 논문이다. 그러한 짧은 인사말에 대하여 상대에 부담 없고 분위기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상대에 따라 별안간 쉽게 나오기가 쉽지 않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만났다면, 옷차림을 보면 외출을 하시는지, 가볍게 운동을 하려는지 짐작이 간다. “좋은데 가시는 군요. 잘 다녀오십시요”“운동 나가시는군요. 참 건강해 보이십니다”상대에 부담이나 저항을 주지 않는 멘트다. 중·고등학생을 만나면 “공부하기 힘들지, 공부도 고생이야” 짧은 위로의 말도 적합하다.
적합한 인사말은 상황과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만 금기시할 것은 진짜질문, 답변을 강요하는 질문이나 “오늘 기분 좋으신가요?”같은 엉뚱한 인사말은 피해야 한다. 당연히 “비 오는 날은 기분도 침침해지죠”같은 비판이 담긴 말도 금기어일 것이다. 답변이나 대답을 요구하는 말은 부담을 준다. 대답을 안 해도 웃어만 줄 수 있다거나 고맙다고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인사멘트가 좋은 질문이고 대화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 앞서야 좋은 대화가 성립한다.
평소 누구에게 어떤 인사말 멘트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서 어색한 상대들과 자연스럽고 덜 불편한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도 유쾌한 일상을 만드는 일이다. 만약, 만원 엘리베이터에 탔다면 입 다물고 조용히 가는 것이 예의에 맞을듯하고, 여성과 남성이 단둘이 탔다면 가벼운 목례 정도가 최선일 듯하다.

중증의 정신질환자 43만 명 시대
사회의 작동 근간 자체가 경쟁이다. 학교도 경쟁해서 입학하고 시험이라는 걸 통과해야 취직도 한다. 직장 내에서도 진급이라는 경쟁이 있고 기업 간의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국가 간의 경쟁에서 낙오하면 국민이 괴로운 낙오자가 된다. 경쟁사회에서 나를 지키고 나타내기 위한 몸부림들이 때로는 정신적 압박과 고통으로 접근되고 이겨내지 못하거나 순화되지 못하면 병적인 증세를 갖게 된다. 정신질환자의 공통점 중 하나는 치료의 거부다. 치료만 받으면 쉽게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음에도 정신과 치료라는 자체가 자신이 정신병자라고 낙인찍히는 효과 때문에 지나친 걱정으로 치료를 계속 기피하여 결국 중증으로 빠져든다.
가족들의 권유를 피해 가출하거나 진주의 안인득처럼 홀로 살면서 치료 방치상태에 빠질 경우대책이 시급하다. 경찰과 의사의 판단으로 응급 입원하는 제도와 지자체가 보호자를 대신해서 강제치료, 입원시키는 행정입원 제도도 있지만 활성화되어 있지 못하다. 선진국처럼 법원이 강제입원 필요성을 판단하여 입원시키는 “사법입원”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고 정부와 지자체, 경찰의 적극적 대응도 시급한 사안이다. 43만 명의 이웃이 다 불안한 것은 아니지만 안인득처럼 방치되면 비극은 이어질 것이고 사회는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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