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화해할 시간입니다 제1회

최영찬 소설가

남북 접경지 김포에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북한군이 남침하고 그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슬픈 이야기다. 전쟁에는 무기를 가지고 서로 싸우는 군인보다 몇 배의 민간인이 죽는다. 대부분 포격으로 죽기도 했지만, 적으로 오인되어 죽기도 했다. 전쟁은 잠재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적측의 남자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투가 없을 때 벌어지는 민간인 학살은 야수와 같은 만행이다.

군은 전시 상황이라고, 불가피한 작전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우리 가족과 친척이 죽었다고 분풀이로 복수하기도 했다. 이런 무분별한 학살을 만류하고 학살자를 질책한 군인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존엄성’을 보이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같은 편의 범위를 벗어난 민간인을 처형했다.

김포에서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과 함께 또 다른 학살이 있었다. 정부에서 좌익과 부역자 색출 명령이 경찰에 하달되고 경찰은 마을 사정을 잘 아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조직을 만들어 학살하도록 사주했다. 정당한 절차를 밟은 재판 없이 벌어지는 일방적 학살은 ‘빨갱이’가 그 대상이다.

이들 희생자는 고문에 의한 증거조작으로 ‘빨갱이’라는 증오와 모욕의 딱지를 붙이고 죽였다. 학살 대상자가 도주했을 때는 그 가족이 대신 죽임을 당했는데 한 살짜리도 있었고 37명의 일가가 모두 살해되는 일도 있었다. 이런 대량 학살은 김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진 잔혹한 사건이다.

그러면 가해자는 누구인가. 특정 지역에서는 군인, 경찰이 저질렀지만, 김포에서는 경찰의 종용으로 학살을 저지른 치안대였다. 이들은 우익 성향이 뚜렷한 청년단 출신이거나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청년, 외지에서 들어온 뜨내기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완장을 채워주자 그동안의 열등감, 소외감에서 벗어나 무도한 행동을 많이 했는데 국가의 명령을 자신이 수행한다는 사명감이 충만했다. 공권력을 가진 경찰은 자신의 양심에 꺼리는 일을 이들에게 떠넘겼다.

이런 가해자-피해자 구성과 함께 방관자가 있다. 이들은 자신이 목격한 대학살을 쉬쉬하며 동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실상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우리 가족의 안녕을 위해 장님, 벙어리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행여 남들에게 떠벌리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켰다. 피해자 가족들도 부역죄로 죽거나 가족이기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에 대해 입 밖에 내기를 꺼렸다.

모두를 침묵하게 한 것은 법을 넘어선 잔인무도함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에 피해자 가족들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왔으나 곧이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주동자는 처벌당하고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정부는 진상을 은폐하고 조작, 왜곡하며 국민의 귀를 막았다. 학계에서도 연구할 수 없었다. 국가가 국민의 목숨을 빼앗은 사실에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으니 공산주의 추종자를 뜻하는 ‘빨갱이’로 죽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공이 국시인 대한민국 공동체의 도덕 윤리는 애써 민간인 학살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법에 따른 학살도 인권유린이지만 유족들에 대한 감시와 사찰도 심각한 인권 침해를 가져왔다. 피해자가 좌익도 아니고 부역자도 아니지만, 가족이라는 연좌제로 사회진출에 지장을 가져왔다.

군인이나 공무원 임용에도 불이익이 따랐고 정보기관의 감시망 속에서 개인 활동에 제약을 가져왔다. 수시로 정보경찰이 찾아와 동태를 살피고 몰래 촬영했다. 이러한 사찰이 이웃에게 알려져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독재정권 사이사이에 민주의 기운이 싹틀 때 학살사건 규명을 바랐으나 번번이 좌절되었다. 2005년에서야 본격적으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기본법이 통과되어 꼭꼭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게 되었다. 돌아가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각성에서 나온 것이다. 조사 위원이 증언자와 면담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쳤다. 이러한 증언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빨갱이’ 가족의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남겨진 증언은 다시는 이 땅에서 이 같은 야만적인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어장치가 된다. 국가가 과거의 학살을 감추고 정당화하는 것을 폭로함으로 정치권력의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각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증언에는 피해자의 유족에 대한 사과와 함께 보상이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과 함께 위령제를 통해 이들의 억울함이 김포 시민에게 알려졌다.

그동안 피해자들의 유족이 이 문제를 거론하면 가해자나 그 후손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치안대가 되어 희생자를 처형한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있었다. 이것은 단지 김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진 일로 지금도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피해자 유족들의 불만도 남아있다. 과거사 위원회의 홍보 부족으로 피해자 유족들의 신고가 미진했고 보상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거사 위원회의 성과는 컸다. 가해자 색출이나 처벌은 할 수 없다. 70년 세월은 법적 시효를 지나 역사적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진실은 어느 정도 밝혔고 국가의 보상이 있었으니 화해의 길로 나설 때다. 대다수의 피해자 가족이 바라는 것은 가해자들이 직접 자신들에게 직접 사과하는 것이다. 생존한 가해자도 몇 명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나이가 된 것이다. 그 당시 가해자는 악당이 아니다. 그들도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목숨이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후손들이 바라는 것은 처형 당시의 진실을 듣고 사과의 말과 용서의 말이 오가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김포는 ‘평화문화도시’다. 조강을 가운데에 두고 남과 북이 대치하는 접경지이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김포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을지는 모르나 서로 어울려 살았다. 공산주의, 민주주의 모두 설익은 이념 아래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불행한 학살이 벌어진 것을 시대상황으로 인식하고 이제는 화해해야 한다.

가해자가 사망했을 때는 그 후손이라도 피해자 유족을 만나 사과하고 유족은 기꺼이 용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김포가 진정한 평화도시가 되는 것이다. 신고 절차를 몰랐거나 두려움에 밝히지 못하는 후손은 이번에 한국전쟁 유족회에 신고하기 바란다. 10월에 거행되는 위령제 시점에 맞춰 김포에서 희생된 몇 분의 유족 말씀을 채록 정리해서 게재한다.

연락처 :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김포유족회장 민경철 (010-8832-6351)

위령제 : 일시 - 2021년10월23일 오전10시정각
            장소 - 김포 하성면 태산공원(패밀리파크) 희생지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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